
[Ocean View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젊고 감각적인 주 고객층을 위한 인테리어로 이루어진 호텔 로비. 샹젤리제 덕분에 웅장한 듯 싶지만 독특한 디자인의 바닥 장식과 곳곳에 심어진 생화가 사람들의 시선을 이끌었다. 아. 시선을 이끄는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아니. City View로 부탁드립니다.]
동양적인 얼굴이지만 얼굴 전체를 다루는 선은 곧게 뻗은 직선인 매력적인 얼굴. 그에 반하는 낮은 목소리로 튀어나오는 중국어. 높고 낮은 성조를 가진 중국어가 저렇게 음울하고 진중하게 들릴 수 있는 거였나. 단정한 검은 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보며 짧게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고객이었다. 한국 국적인 것 외엔 신원 미상인 VVIP 고객. 매일 아침부터 꽉 차는 바람에 돌아가는 관광객들이 허다한 오션뷰 대신, 이미 넘쳐나는 씨티뷰를 고르는 것부터 평범치는 않아보였다. 평범하지 않은 비주얼과 평범하지 않은 손목께의 강아지 타투. 한 쪽 귀가 잘린 섬찟한 타투가 새겨진 얄쌍한 손목으로 남자는 잘도 서명을 했다. Jin. 짧은 이름이지만 왠지 뇌에 깊게 새겨지는 듯 했다. 직원은 최대한 미소로 대했다.
[하지만 VVIP실 중 City View는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냥 Ocean View를,]
[내가 언제 VVIP실을 달라고 했던가.]
[...]
[실례했어요.]
그대로 남자가 뒤를 돌아 나간다. 그 남자를 뒤따르는 일행이 꽤 있다. 남자는 다여섯명 정도의 보디가드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까지 모두 뒤를 돌자 직원이 참았던 숨을 한번에 터뜨렸다. 같은 남자인데도 부드럽다고 느껴지는 얼굴과 목소리지만 이상하게 숨을 계속해서 참을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리라. 괴이한 기류가 계속해서 직원을 감쌌다. 오늘은 퇴근하는 길에 뜨끈한 국수라도 말아야겠다. 일진이 사나운 걸.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직원이 의자에 앉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어. 그러나 전혀 반갑지 않은 내용이었다.
"죽여. 이 로비 안에 있던 직원, 투숙객, 모두."
"예."
남자의 짧은 대답과 함께 문이 닫혔다. 그 뒤로도 수많은 고객들이 그 유리문을 열고 닫았지만. 오늘 이후로 저 문은 영원히 닫히게 될 거라는 걸. 유일하게 방금 남자를 응대한 직원만은 알아차리게 되었다. 쾅. 폭발음이 울렸다. 홍콩 내 수많은 건물 중 하나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
CODENAME JIN
AGE 30
TARGET
탁. 정국이 검은색 L자파일을 덮었다. JIN? 파일을 건네받은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말없이 칼 하나를 내밀었다. 이상하게도 칼날은 죄다 무뎌져 있었다. 한 뼘 정도 되어보이는 칼 언저리엔 작게 각인이 되어있었다. 정국이 살짝 실눈을 떠 가까이 다가가자 J.I.N. 이 흐릿하게 써 있다. 아하. 정국이 재미있겠다는 듯이 뒤로 넘어가며 웃었다. 아이 같이 순한 웃음 뒤. 엉뚱하고도 잔인한 생각이 가득함을 여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뒤돌아 창고를 나섰다. 위험 표시가 되어있는 LPG통들과 드럼통들이 가득한데도 여인은 아무렇지 않게 그 사이를 저벅저벅 걸었다. 정국이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칼을 살짝 매만지자 검지손가락 새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 칼로 저 여인은 목소리를 잃었고. 이 칼로 자신은 주인을 잃었다. 칼의 원래 주인은 정국의 주인이기도 했다. 갑자기 당장에라도 귀를 찢을 것 같은 이명이 들려오자 정국이 짧은 신음을 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귀를 양손으로 틀어막자 칼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버림 받았어.
초록색 페인트가 아무렇게나 칠해진지 오래된 바닥은 퀘퀘한 냄새를 풍겼다. 정국은 두통에 저절로 몸을 숙였다. 그렇게 새우등처럼 굽어진 불쌍한 몸 옆에 그를 상처낸 칼 또한 버려져있었다. 주인의 명령 없이 감히 무언가를 베어버린 칼은 주인에게 버림 받는다. 그래서 정국은 버림 받았다. 아주 매몰차게.
그렇기에. 정국은 들개였다.
들개
진국 느와르 합작
몽드(@monde_ssulroom)
"오랜만이야."
뻔뻔한 남자의 말에도 정국은 표정 변화 따위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남자가 먼저 연락을 해올 때부터? 남자가 겁도없이 정국의 호텔을 무너뜨릴 때부터? 그의 표정을 대개 Poker Face라 부른다. 남자는 마치 자신이 포커판 위에 올려진 생선 같다는 생각을 했다. 도통 웃지를 않는 상대 앞에서 남자는 꺽꺽대며 웃어보였다. 말그대로 그건 보이는 거였다.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 웃지 않는 상대 앞에서, 남자는 오히려 마찬가지로 감정을 드러내기 싫어하기에 웃었다. 남자는 정국보다 훨씬 더 많은 횟수로 포커판에 손목이 올려진 사람이다. 그는 좆같은 포커판 위에서 포커페이스 따위 존재치 않는다는 것을 제 나이보다 너무 일찍 깨달아버리기도 했다. 정국은 아마 이 실없이 웃는 자신의 전(前) 주인이 미심쩍기도 했을 것이다. 시궁창에서 뒹구는 개새끼들이 천지인 이 곳에서 뭐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듯이 매일 허허실실 웃어대는 남자가. 개새끼의 입장에선 당연히 의심스러웠으리라. 하지만 그저 남자는. 감정을 숨기기 위한 방법으로 미소를 택했을 뿐이다. 무표정보다 수백배는 쉬운 표정. 그 웃음에 개새끼는 단단히 홀렸던 것이 틀림없었다. 잠자코 책상에 앉아있던 정국이 겨우내 입을 열었다.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곧 우리 정국이가 찾아올 것 같길래."
"호텔은 터뜨리지 말지.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 죽여놨잖아 형."
"설마. 내가?"
"..."
"그 날 밤엔 거기 네 친구들만 묵는 거 알고 그랬지."
마지막 문장을 조금 더 늘려말한 남자가 장난스레 웃었다. 또 웃네. 그러나 여전히 정국의 포커페이스는 무사했다.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내려갔다. 정국아.
"일 하나만 같이 하자."
소파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려던 남자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정국이 기어코 주먹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소파에 그대로 눕혀진 남자는 피터진 입술로도 웃었다. 입꼬리 옆에 살짝씩 새어나오는 피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쏟아진 커피냄새에도 묻히지 않고 여기까지 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웃었다. 정국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를 감추려 손을 급히 등뒤로 숨겼지만 손쉽게 발견한 남자는 점차 웃음기를 지워냈다. 난 정국이한테 감출 거 없는데. 남자가 천천히 정국에게로 얼굴을 가까이했다. 포커페이스고 뭐고, 여전히 너한텐 필요없을 거 같아. 한 번 개새끼는 영원한 개새끼잖아. 정국이 고개를 처참히 떨어뜨렸다. 자신의 보이지도 않는 꼬리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아서, 그 모멸감에 몸서리쳤다.
이 곳은 사무실이었다. 10년전 쯤 남자가 고위급 간부들을 만나기 위해 사들였던 곳이지만, 정국을 버리고 사업장을 홍콩으로 옮긴 4년 전 이후론 쓸모가 없는 곳이었다. 그래서 홀랑 팔았는데, 다시 정국이 이 곳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꽤 깜짝 놀랐던 것 같다. 등잔 밑이 어둡단 말. 진짜 맞는 말이라니까? 어쨌든. 정국이 그렇게 자신의 트라우마로 얼룩진 곳에서 일할 만큼 성장했다는 사실을 4년이 지나서야 남자는 알았다.
"...괜찮아?"
그러니까 남자의 뜻은. 문 바로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정국의 부하들이, 얼굴을 고작 3센치만큼 가까이한 자신들을 이렇게 빤히 보고 있어도 되겠냐는 속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제야 인상을 찌푸린 정국이 그들에게 짧게 손짓했다. 주인답지 않네. 나한테 괜찮냐는 말을 다하고. 남자가 정국의 목을 지분대며 부하들이 다 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문이 찰칵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그대로 입술이 짧게 맞닿았다. 그러자 정국이 괜히 자신의 목께를 매만지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 만…. 나 이러니까 진짜 목줄 찬 거 같아. 남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도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굴었다. 애가 닳아 달싹이는 입술을 가만 둘 수 없었다. 남자는 급작스레 자세를 뒤집었다. 정국이 그렇게도 상상한 재회의 키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비릿한 맛이었다. 역겨워서 눈물이 다 났다. 꽤 다정한 듯한 입맞춤에도 정국의 무표정한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남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렵네.
×××
쓸데없이 밝은 서울의 밤. 한 건물의 옥상에 자욱한 연기가 퍼졌다. 그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던 정국이 누군가를 기다렸다. 얼마 전 남자가 제안한 그 '일 하나'를 위해서였다. 정국이 물끄러미 한강대교를 건너는 차들을 구경하다가 뒤에서 오는 구두소리에 뒤를 돌았다. 또 예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였다.
정국을 버렸다가 4년 만에 다시 주운 남자의 이름은 김석진. WWF의 대표이사. 사실상 명목만 있는 직급이었다. 석진은 그 직급을 이용해 바닥에서 세력을 키워왔다. 그 정도 돈을 갖고 있음에도 수없이 쇠똥구리들을 모은 이유는 이러했다. 그는 서자였다. 말 그대로 WWF의 옥에 티였고, 언제든지 버려질 수 있는 존재였다. 19살 뜨거운 여름 돈 한 푼 없이 WWF의 견제 회사 조직에 끌려갈 뻔한 끔찍한 사건 이후로 석진은 꾸준히 지하에서 놀았다. 지하가 탄탄해야 지상이 버틸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석진이었다. 그 지하가 모두 똥밭일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단단하고 봐야 했다.
"별 거 아니야. 우리 집 어떤지 알잖아."
"...?"
"애인 역할 좀 해줘."
정국이 짧게 욕을 짓이겼다. 뻔뻔해도 어떻게 이렇게 뻔뻔해? 정국이 기가막혀 석진을 바라보자 석진이 아무렇지 않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그냥 잠깐 연인 놀이하자고. 석진의 그 가벼운 말에 석진의 집에서 밥 몇 번 먹고 뺨 몇 번 맞으면 되는 줄 알았던 정국이었다. 계약서를 흝어보지도 않고 대충 싸인했다. 석진이 얘 뭐야, 라는 표정으로 멍청하게 정국을 보자 정국이 어깰 으쓱했다. 김석진 너 나 죽일거야? 아님 됐어. 옥상의 차가운 바람이 괜히 정국을 들뜨게 만들었다.
정말 밥 몇 번 먹고 뺨 몇 번 맞긴 했다. 첫번째로 석진의 본가에 들어가 자신이 애인이라고 소개할 땐 좀 짜릿했다. 마지못해 밥을 내어오는 가사도우미에 숟가락을 들며 감사하다고 꾸벅 인사하다가 석진의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두번째로 석진의 본가에 들어갔을 땐 밥을 몇 번 퍼먹다가 석진의 손을 꼭 잡고있는 것을 발견한 석진의 새어머니에게 뺨을 맞았다. 세번째엔 입맞춤도 했다. 다행히 정국의 다 터진 입꼬리를 발견한 석진이 매서운 시선으로 부모님을 쏘아본 탓에 뺨은 돌아오지 않았다. 네번째엔 둘의 미국 시민권자와 영어로 써진 혼인신고서까지 보여드렸다. 이제 끝? 조수석에 올라탄 정국이 석진에게 묻자 기어를 고쳐잡은 석진이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아쉽네. 석진이 말했다. 그 얼굴이 꽤 굳어져있음을 정국은 눈치챘지만,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그간 일명 '연인놀이'를 하며 자주 느꼈던 기시감이었다. 석진이 예전의 석진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이 놀이가 빙산의 일각인 것 같은 느낌.
"여기서 내려주면 돼."
"어. 잠깐만."
석진은 정국의 사무실 바로 앞 갓길에서 멈추었다. 정국이 조수석에서 내려 문을 닫았다. 그러나 이내 다시 닫힌 차창을 똑똑 두드리자 창문이 천천히 내려갔다. 어리둥절한 석진을 보고 조금 웃은 정국이 살짝 몸을 숙여 말했다.
"…. 근데, 나 그냥 보낼거야?"
"……"
"김석진. 나 진짜 그냥 가?"
석진이 기어를 D로 바꾸려다가 정국의 말에 덜컥 멈추었다. N. 기어는 중립(Neutral)에서 멈추었다. 석진이 말을 잇지 못했다.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팽팽하게 부딪치던 시선이 먼저 고개를 틀어버린 석진 탓에 어긋난다. 갈게. 정국이 어딘가 미련이 묻은 듯한 목소리로 말하곤 뒤를 돌았다. 썩어 빠진 건물 꼭대기에 위치한 사무실까지 정국이 터덜터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렇게 차창을 통해 멍하니 보았다.
딱 그로부터 일주일 뒤였다. 정국이 홍콩에 마련해뒀던 호텔 중 하나가 또 무너졌다. 이번엔 절대 석진이 아니었다. 무고한 사람들도 묵는 곳이었으니까. 어울리지 않게 아이를 사랑하는 석진이 4인가족이 주고객층인 호텔을 타겟으로 할리가 없었다. 수많은 가족이 죽었다. 전세계의 뉴스가 모두 'WWF 산하 조직의 비겁한 테러'라고 이름 붙였다. 아닌데. 김석진 아닌데. 정국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김석진이 무언가 일을 크게 벌리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재빠르게 홍콩행 티켓을 손에 쥐고 공항으로 향하던 정국이 차 핸들을 틀었다. 김석진부터 만나야해.
×××
정국은 무너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로. 몇 시간 전만 해도 WWF의 대표이사실까지 찾아가 석진을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잠시 나와달라는 비서의 요청에 스스럼없이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던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러나 정신 차려보니 앞이 보이지 않고, 손이 청테이프로 묶인 채 등 뒤에 있었다. 청테이프야 손쉽게 끊었지만, 앞을 가리는 넥타이를 풀어내려는 찰나 뒤에서 누군가 발차기를 한 번 했다. 무릎이 강제로 꿇린 정국은 자신의 어깨를 짓무르는 사람을 노려보았다. 보이지 않아도 얼핏 코를 스치는 체향으로 알 수 있었다. 김석진이잖아.
"뭐야, 김석진."
"국아."
"...갑자기,"
왜 그렇게 불러. 정국의 눈을 가리던 넥타이가 눈물로 젖기 시작했다.
"나 진짜 죽이게?"
석진은 말이 없었다. 정국이 기어코 풀어낸 손목을 더 단단히 묶고 있을 뿐이었다.
"또…."
나 버리게? 그제야 석진이 멈추었다. 정국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정국은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석진이 하려던 일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했다. WWF를 완전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러나 지금 그렇게 고대해오던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음은 분명했다. 석진이 또 한 번 국아, 하고 불렀다. 정국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그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따가워서, 또 울음이 나왔다. 넥타이가 눈물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천천히 끌러졌다.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백하게 질린 석진의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여전히 석진은 한 손으로 정국의 왼어깨를 꾹 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손목."
앞전의 한 호텔 직원이 기겁했던 그 섬찟한 강아지 타투였다. 그건 정국이었다. 한 쪽 귀가 잘린 강아지. 4년 전 석진을 찾다가 휘말린 폭발사고로 인해 한 쪽 귀가 멀어버린 전정국. 다 알고 있었구나. 정국이 참아왔던 숨을 터뜨렸다. 맞다. 정국은 석진을 죽이기 위해 그 계약서에 싸인했다. 파렴치한 얼굴로 자신을 버리던 4년 전 얼굴을 절대 잊지 못한 정국이기에 또 다시 그 얼굴을 하고 오는 석진을 어서옵쇼, 하고 반겼다. 연인놀이를 하는 내내 틈틈이 기회를 엿봤던 정국은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석진이 모든 성공을 이루어냈을 때 죽이자. 그 편이 훨씬 잔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석진은 다 알고있었다고. 손목의 타투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석진은 그럼에도 다가왔고, 입맞추었다. 그럼에도 사랑을 연기했다. 시린 손목을 가지고.
"버림받은 게 너만은 아니야, 국아."
"..."
"4년 전 널 버린 이유는... 이제 너도 알잖아."
개새끼가 사랑을 해서였다. 그 상대가 주인이어서. 그래서 버렸다.
"정국아. 그래도,"
"... 진짜 개새끼."
"너는 웃어. 포커페이스 그런 거 말고. 진짜 행복해서 웃었으면 좋겠어."
뭐?
정국이 다시 올려지는 넥타이와 다시 가려진 시선에 어리둥절했다. 죽이려는 게 아냐? 그대로 한 쪽 귀에서 구두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마침내 구두소리마저 없어지고, 정국의 폐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소리만이 창고를 채우고 있었다. 정국이 쉽게 일어나지 못 했다. 꼭 마지막을 얘기하는 것처럼 굴잖아, 김석진이.
해가 다 떨어지고 있었다. 노을이 점점 퇴색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밤이 된다. 꽤 차가워진 창고 내 온도에 정국이 손목을 풀어냈다. 넥타이도 천천히 내렸다. 눈을 오래 감고 있던 탓에 앞을 보는 것이 익숙치 않았다. 정국의 큰 눈이 몇 번 깜박였다. 앞에 누군가 있었다. 검은 정장을 빼 입은 여인이었다. 김석진에게 목소리를 잃은 그 여인. 여인이 다시 L자파일을 내밀었다.
×××
[속보입니다. WWF 대표 김 모 씨가 사유재산을 전액 기부하여...]
[속보입니다. 얼마 전 일명 기부천사로 유명세를 얻었던 김 모씨가 회사 내 비리문서를 검찰에 넘긴 후 실종...]
[속보입니다. WWF 대표 김 모 씨의 시체가 홍콩의 한 펜트하우스에서 발견되어...]
×××
개새끼는 아침을 향해 짖었다. 막 떠오르려다 사라질 것이 꼭 자신 같아서, 그래서 짖었다. 알고보니 그 아침이 자신을 다시 거둔 주인이었다는 것을. 주인이 죽고 혼자 남겨진 개새끼는 알리가 없었다. 정국이 가슴을 마구 뜯으며 울었다. 한 번 들개는 영원히 들개인 줄 알았다. 이미 한 번 버려졌으니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주인을 미워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주인 말대로. 이미 세상으로부터 미련없이 떠난 그 김석진 말대로.
한 번 개새끼는 영원히 개새끼였다. 여전히 들개는 주인을 사랑했다. 무덤 앞에서조차 제 흔들리는 꼬리 하나 숨기지 못한 채.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