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한 햇빛이 눈을 찌르는 듯이 쨍하게 들어왔다. 좀 더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눈을 찌르는 햇빛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끔벅이다가 손으로 문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고 힘겹게 창문으로 가까이 다가가 두껍고 어두운 커튼을 쳤다. 커튼을 치지도 않고 자다니 많이 피곤하긴 했구나 싶어 일어선 김에 차가운 물 한잔을 들이키고 침대로 돌아왔다. 다시 뜨끈한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제서야 침대에 누워있는 또 한사람이 보였다. 일났다. 도대체 얼마나 마셨으면 옆에 누가 자고 있는 것도 기억을 못할 수가 있지 싶었다. 기억을 못한 건 누가 자고 있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깨기 시작하니까 점차 기억이 돌아오는 것도 같았다. 지금 저기서 자고 있는 사람도 누군지 알아차릴 정도였다. 같은 과 선배인 김석진. 평소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던 개총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쪽 구석에 앉아있던 김석진. 혼자 홀짝이는게 안쓰러워 앞에 앉아서 같이 마시다 보니 속도가 너무 빨라서 취해버렸고, 기분도 좋았고, 날씨가 좋았다. 평소 같으면 적당히 빠져나왔을 술자리를 끝까지 있던게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평소 같았더라면 이렇게 옷 다벗고 한 침대에서 김석진이랑 마주 할일도 없었을텐데.
개총을 생각하니 일들이 하나둘씩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다. 집주소가 어딘지 물어도 헤실하게 웃어대기만 할뿐 주소를 말하지 않길래 내 자취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부모님이랑 같이 산다면 연락을 드리라고 해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이리 헤실 저리 헤실 대길래 대충 침대에 눕혀놓은게 화근이었다. 시간도 늦었고 술도 적당히 취했으니 김석진의 옆자리에 누웠었다. 천장을 보면서 숨을 고르는데 내 위로 올라타는 김석진, 아니 김석진의 위로 올라타는 나. 거기까지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드문드문 내 손목을 잡고 위로 올려서 고정시키는 김석진이나 거친 숨소리들이 떠올랐다. 미쳤어, 미쳤어. 어쩌자고 같은 과의 선배랑 그랬지? 술이 웬수다.
마음 같아서는 서로 어색해지니 깨우지 않고 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중천에 떠있는 해가, 그리고 이불속에 파묻히긴 했지만 어쨌든 들리는 것 같은 김석진의 핸드폰 벨소리가 신경쓰여 깨울 수밖에 없었다. 김석진을 깨우려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가는데 내 무릎에 끌어내려진 이불 때문에 나는 떡 벌어진 김석진의 등을 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게 나의 고의는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의 반복이 지나 나에게 보이는 건 김석진의 등에 떡하니 그려져 있는 호랑이 한마리였다.
Tiger on
w.월도
나는 생각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정리가 되지 않는 머릿속은 아직 어젯밤의 일도 적응하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이제 어젯밤의 일은 일도 아니게 되었다. 호랑이와 눈이 마주치고 나니 김석진을 깨워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릎걸음을 하던 그 상태로 가만히 보고만 있게 되었다. 호랑이라니. 그것도 아주 거대한 호랑이였다. 등짝을 가득 채우는 호랑이였다. 문신자체에 놀란 건 아니었다. 문신은 많이들 하지 않나? 동기 중에도 타투라면서 보여주는 애들도 여럿 있었다. 등짝을 가득 채운 호랑이를 마주한건 처음이긴 했지만.
혹시나 어두운 방안 때문에 잘못 보는 건 아닌가 싶어 다시 창가로 돌아가서 커튼을 젖혔다. 다시 따가운 햇빛이 침대로 내리쬐었는데 그 덕분에 호랑이가 더 잘보였다. 잘못본게 아니었다. 호랑이가 등짝에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김석진한테. ‘그’ 김석진 등에 호랑이가 있었다. 어젯밤 나와 함께 있었던 ‘그‘ 김석진의 등에. '그' 김석진이 어떤 사람이냐면 정말 말 그대로 '그' 김석진이다. 저 사람도 우리 학과였어? 하게 만드는 사람. 학과생활이 싫은 건지 오티도 엠티도 참여하지 않아, 강의실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 후문에서 마주치기가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것보다 더 힘든 사람. 얼굴의 반을 가리는 동그란 안경을 쓰고 모자를 안 쓰는 날보다 쓰는 날이 더 많고 셔츠에 과잠을 입는게 디폴트인 사람. 다른 동기들이나 형누나들한테 물어봐도 잘 모른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다수인 사람. 존재감이 없는, 아니 존재감을 없애는 사람.
"도대체 호랑이가 왜 있는거야..?"
내가 패닉이 되든 말든 이불속에서 들리던 벨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리더니 가만히 누워있던 김석진의 미간이 찌푸러지기 시작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배게에 얼굴을 더 깊게 파묻은 것도 잠시 이내 한 손을 뻗어 이불 안을 더듬거리더니 핸드폰을 찾은건지 소리가 뚝 끊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앓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일어나서 앉았다. 그리고 푹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왜."
내가 서있는 곳에서는 김석진의 뒷통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짜증이 가득 담겨있는 것 같았다. 어제도 저런 목소리였다. 푹 잠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매달리는 내가 생각나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김석진은 전화를 대충 끝내고 이불 안에다 던져두었다. 뒷머리를 북북 긁더니 하품도 늘어지게 해댔다. 등짝에 호랑이가 있어서인지 그 모든 행동이 사냥을 끝내고 돌아온 짐승 같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뚝 소리가 나게 목 운동을 하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마주친 눈이라 선배 등에 왜 호랑이가 있냐는 말도 건네지 못했다. 눈을 끔벅거리면서 나를 보던 김석진은 이내 씩 웃어보였다. 나는 지금 당신의 등에 호랑이가 있어서 놀랬는데 당신은 아무렇지 않게 웃어...?
"잘 잤어?"
그렇게 따지기에는 나에게 아침인사를 건네는 김석진의 얼굴이 너무 눈부셨다. 안경을 벗은 얼굴은 훤칠했고 모자로 푹 눌러써서 가려졌던 얼굴은 또렷하게 잘만 보였다. 미남의 정석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만약 김석진이 안경도 쓰지 않고 모자를 푹 눌러쓰지 않는다면 지금 같은 아싸 생활을 절대. 저얼대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김석진은 두리번거리면서 방안을 훑어보더니 옷을 벗고 있는 사실을 깨달은 표정으로 침대 밑에 떨어진 옷을 입으려는 건지 침대에서 일어났다.
누워있는 김석진의 등에서도 넓은 덩치가 눈에 띄게 보였는데 일어서니까 더 확연하게 보였다. 김석진은 덩치가 컸다. 자세하게 보지 못한 나 혼자만 놀란건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아무하고도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지 못할 만큼 아싸로 지낸 시간이 신기하기만 했다. 저 얼굴에, 저 몸인데 아무도 친하게 지내려 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안됐다. 왜? 왜 김석진은 혼자 학교를 다니기를 자처하는걸까.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어제 개총은 왜 온걸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옷을 주우려 몸을 숙여서 언뜻 보이는 호랑이와 마주하면서 끝났다. 그래서 저 호랑이는 왜 있는 걸까.
"너는 옷 안 입어도 돼?"
어느새 어제 입었던 그 옷을 입은 김석진이 의아하게 쳐다봤다. 아. 맞네. 나 옷도 안 입고 있었네. 그제서야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져있는 옷을 주워 껴입기 시작했다. 누가 옷을 벗을때 부끄럽다 했는가. 기억도 안나는 어제의 옷을 벗었던 순간보다 지금이 더 화끈거렸다. 사람 옷 입는데 꾸준하게 달라붙는 시선에 귀가 홧홧해지는게 느껴졌지만 방금 나도 김석진이 옷 입을때 계속 보고 있어서 차마 보지말라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다.
"벌써 점심이네. 나 점심 여기서 먹고 가도 돼? 이미 수업은 늦어서."
"라면밖에 없는데."
"나 라면 좋아해."
"제가 끓일게요."
부엌겸 거실겸 침실인 원룸에서는 김석진이 있는 침대에서 내가 향한 부엌이 한눈에 다 보이는 구조일수밖에 없었다. 냄비를 꺼내고 물을 넣어 물을 끓이는 동안 라면 두 개를 터놓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김석진에 대한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왜. 김석진은 등에 왜 호랑이가 있을까. 등에 그렇게 커다란 문신이 있는 사람들은 깡패들 아닌가?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 깡패가 나올때 등이나 팔뚝에 커다란 호랑이나 용같은 문신들이 가득 차있는 것을 종종 볼수있었다. 그럼 김석진이 건달이라고? 전혀 믿기지 않았다. 싸움은 커녕 말다툼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무슨 건달이야. 말도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취미인거 아닐까. 생각이 들었지만 도대체 누가 취미로 등짝에 호랑이를 박아넣느냐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바로 포기했다. 그럼 도대체 왜.
"정국아."
바로 뒤에서 들리는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생각보다 더 가까이 있었던 김석진의 얼굴에 놀라기도 전 나를 감싸며 손을 등 뒤로 뻗는 김석진의 행동에 온 몸이 뻣뻣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이 떠오르면서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잔뜩 긴장한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김석진은 내 등뒤에 있는 가스레인지를 줄였다.
"물 끓는데 아까부터 안 끄길래. 조심해야지."
김석진의 손이 내 등 뒤로 뻗어있다는 말은 김석진의 눈동자가 나와 가까이 마주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김석진은 절대 내 눈을 피하는 일이 없었다. 강의실에서 마주할 때도, 도서관에서 마주칠 때도, 개강총회에서 있었던 술자리에서도, 내 침대 위에서도. 김석진은 단 한번도 내 눈을 먼저 피한 적이 없었다. 눈을 피한 건 나였다.
어찌됐든 김석진의 등에 있는 호랑이에 정신이 팔린 나를 대신하여 불을 꺼준건 맞으니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다.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뒤에 라면을 끓여야겠다는 것까지 생각을 마쳤다. 입 밖으로만 내뱉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 입 밖으로 나온 건 내가 생각했던 문장이 아니었다.
"등에 왜 호랑이가 있어요?"
말을 내뱉고 나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찬찬히 깨닫게 되었다. 나 지금 뭐라고 한거야. 내 말에 내가 놀랐지만 궁금하긴 더럽게 궁금했던 터라 얼버무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정말 궁금하니까. 물론 무례한 질문인건 맞지만 이제 와서 취소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등에 호랑이가 왜 있냐는 내 질문에 김석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대답하기 싫은 질문인지. 대답이 없는 질문인지. 혹은 내가 그런 질문을 해서 당황스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꼭 대답해야 해?"
오늘 일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을 괴롭혔던 등의 호랑이는 결국 마침표를 짓지 못하고 끝냈다. 말하고 싶지 않다는데 더 이상 캐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내가 궁금하다고 해서 남의 사생활까지 깊이 파고들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고. 그냥 보이길래 물어봤다고 대충 얼버무리고 뒤돌아서 라면을 마저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별 영양가 없는 이야기와 함께 라면을 먹고 배웅인사까지 했다. 어젯밤부터 라면을 먹고 보내는 지금까지 계속 같이 붙어있었지만 남는 건 없어보였다.
-
그 날 이후로 김석진은 평소와 똑같이 돌아갔다. 마침표를 짓지 못해 아직도 생각이 나는 건지 나는 김석진을 마주할 때마다 등의 호랑이가 자동으로 생각이 났지만 이미 거절당한 질문은 입안에서만 뱅글뱅글 돌 뿐 입 밖으로는 나오지 않았다. 배웅까지 잘 마무리하고 끝났었지만 그래도 몸을 섞은 사이인데도 김석진은 정말 그 전으로 돌아갔다. 나와 인사도 자주 하지 않던 그 사이로.
사실 바뀐게 단 한 가지 있었다. 김석진이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절대 먼저 피하는 법이 없었던 김석진이 내 눈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고개를 돌리고는 했다. 이래서는 가끔 건넸던 인사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불필요한 질문을 해서? 등에 호랑이가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 나와 이야기 하고싶지 않아서?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나를 피한다는 사실 하나만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왜 피하는거야? 그렇게까지 큰 잘못이었을까. 김석진에게 호랑이가 있냐는 질문이 나를 피할정도로 무례한 질문이었을까.
그래, 무례한 질문이었을 수 있다. 타투를 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만약 등에 커다란 흉터가 있어서 그걸 가리기 위해 일부로 커다란 호랑이를 박았더라면? 내가 물었던 질문이 무례할 수 있다. 근데 무례한 질문을 했더라도 인사도 안하고 얼굴을 피한건 과한거 아닌가? 그것도 하루이틀도 아니고 몇주씩이나. 사과할 기회도 주지않고. 처음 한두번은 나를 못본줄 알았다. 그게 일부러 피하는 건줄 몰랐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일주일, 이주일이 지나고 몇 주가 지나 중간고사를 준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거의 매일 내 얼굴을 피하는 김석진을 보니 고의인게 확실해졌다. 심지어 어제부터는 나오지도 않았다. 그렇게까지 잘못했어?
씩씩 거리는 발걸음으로 다음 수업을 듣기위해 거칠게 책을 꽂아넣고 열람실을 나왔다. 가는 길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하나사서 얼음까지 와그작와그작 씹으면서 강의실로 들어갔다. 얼씨구. 또 강의는 들으려는 건지 김석진은 항상 앉는 구석자리에 앉아있었다. 또. 또 피했다. 내 얼굴. 그래, 내가 잘못한거라면 사과하고 깔끔하게 끝내자라는 생각에 인사를 건네는 친구들을 지나쳐 김석진의 옆에 앉았다. 어차피 옆에 아무도 안앉을 것이다. 이번학기 내내 김석진의 옆자리엔 아무도 앉지 않았으니까.
내가 앉자 과하게 놀란 얼굴이 보였다. 가방을 대충 걸어놓고 책을 툭툭 꺼내 올려두었다. 앞에서는 친구들이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지만 그걸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 나에게 제일 중요한건 내 옆에 앉은 김석진에게 사과를 하고 이 불편한 느낌을 없애는 것뿐이었다. 가뜩이나 시험기간이라 잔뜩 예민해져 있는 터라 성질 급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딱딱한 목소리로 평소와 같이 수업을 진행하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빨리 수업이 끝나고 김석진의 멱살을 잡고 끌고 가 미안하다고 고래고래 소리치고 싶었다. 미안하니까 나 좀 피하지 말아달라고 하고 싶었다. 물론 마음속에서만 생각할 뿐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할거란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날 아침 처음 눈이 마주쳤을 때가 아닌 나중에서야 툭 호랑이에 대한 질문을 했겠지.
'끝나고 저 좀 봐요.'
수업이 끝나갈 때쯤 포스트잇을 떼어 적고선 김석진에게 넘겼다. 포스트잇이 손등에 닿자 필기를 하고 있던 김석진은 펜을 잡은 상태로 내 포스트잇을 읽더니 밑에 답장을 적어 나에게 넘겼다.
'알았어'
이제까지 나를 이리저리 피해 다닌 주제에 대답은 잘한다. 심통이 났지만 지금 당장 말할수없어서 괜히 마음만 급해졌다. 뭐라고 말을 터야할지도 정하지 못했고 어떻게 사과를 할지도 정해지 못해서 발가락이 꿈틀대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도서관에 갈 예정이었으나 김석진이 이렇게 쉽게 동의할줄 몰랐기 때문에 그 일정은 뒤로 미뤄졌다. 정안되면 카페라도 가든가 해야지.
수업이 끝나고 책을 덮은 다음 알아서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김석진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사람의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장소를 찾기 위해 뱅글뱅글 돌았으나 알맞은 곳을 찾지 못해서 잘 다니지도 않는 다른 건물 뒷 편의 어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뱅글뱅글 돌아다닐동안 불평불만없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와 내가 우뚝 멈출때 같이 멈춘 김석진의 인기척에 손끝이 간지러웠다. 이제 뭐라하지.
"죄송해요."
어찌나 급한지 '날씨가 참 좋죠, 하하'라는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마음속에 돌덩이처럼 짓누르던 사과를 먼저 내뱉어버렸다. 최소한 이렇게 사과할 생각은 없었는데. 김석진의 표정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내 사과에 놀란건지 의문이 든건지 동그란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네가 왜?"
"네?"
"네가 왜 죄송해."
얼척이 없었다. 내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것 마냥 나를 피할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내가 왜 잘못했냐고 되물어보는 김석진이 얼척이 없었다. 내가 잘못이 없었으면 왜 지금까지 내 시선을 피하고 모른척했던 걸까. 도대체 왜. 헛웃음이 자동으로 뱉어졌다. 이제까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사과라도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나오는 김석진을 보니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감도 안잡혔다.
"제가 잘못한게 아니라면 왜 저 피해요?"
"뭐?"
정해두었던 순서가 비틀어지면서 생각했던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더 이상 필터를 거치지 않고 말이 뱉어졌다. 하려고 하지 않았던 말들도 내 입을 통해서 술술 내뱉어졌다. 뒷감당을 하지 못할거라는걸 알면서도 내뱉는 말에 후회는 없었다. 우선 지금은.
"아무리 안 친했던 사이여도 그 날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가 호랑이를 못 본 것도 아닌데. 그 날 이후로 모른 척하시잖아요. 어떤게 잘못이에요? 호랑이가 왜 있냐고 물어본 거? 아니면 그 날 자체가 잘못이었어요?"
"너는 잘못 없어, 정국아."
"제가 잘못이 없으면요? 그럼 왜 갑자기 피해요? 이제 제가 보기 싫어요?"
"정국아, 그런 이유가 아니야."
"그럼 왜 그래요. 나는 형이랑 안 좋게 끝내고 싶지 않아요."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으로는 이 분위기를 풀수없었다. 생각을 거치지 않고 뱉는 질문들로 나는 어렴풋이 알게 되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김석진에게 감정이 생겼다는 것. 그게 호랑이를 보고 나서 놀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그 날밤이 이유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그 전부터였는지.
"말해봐요. 왜 피해요?"
"그래,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내 등에 그거 본 거 솔직히 좋지 않아. 후회도 되고."
"어떤게 후회돼요? 제가 호랑이를 보게 한거? 아니면 그 날 자체?"
"그 날 자체. 개총을 가는 게 아니었어. 그래서 너랑 술을 먹는게 아니었어."
"그게 이유에요? 나를 피한 이유?"
속이 꽉 막힌듯 숨이 막혔다. 김석진은 대답할 생각이 없어보였고, 나는 그 대답을 듣고 싶지 않았다. 김석진은 나를 잡지도 않았고 나는 잡힐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날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그 날로 그 사람이 바뀐 나를 강요할수는 없었다. 감정을 알기도전에 몸을 섞었고 고백을 하기도전에 차인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그 다음날부터 내가 먼저 김석진을 피하고자 했다. 그건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김석진은 그 다음날부터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모든일이 있었던 적이 없던 것처럼.
휴학했다, 아니다 자퇴서를 내는 것을 봤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학생에게 당연시하게 들릴 말들조차 들리지 않는게 속이 먹먹했다. 김석진은 궁금증조차 남기지 않았다. 김석진이 남긴건 나에게 생긴 감정 하나 뿐이었다. 이해가 안되기는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존재했던 감정도, 그 감정을 내뱉기도 전에 끝난 사이도, 갑자기 사라져버린 김석진도.
-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직장인이 된 동기들과의 술자리였다. 불금을 그냥 보내서는 안된다며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은 삼겹살집에서 소주와 함께 하고 있던 평범한 술자리였다. 김석진이라고 기억나냐? 그 왜 모자 쓰고 안경 쓰고 구석에 앉던 형. 아, 기억날거같아 그때 개총에서 본거같은데. 개총? 개총하니까 생각난다. 혼자와서 구석에 앉아있던 그 형? 생각해보니까 개총때 전정국 너랑 술 먹지 않았냐? 기억 안나? 아무튼 그 형이 왜? 내가 얼마전에 동료 기자한테 들었거든. 그 형 깡패래.
Tiger On
w. 월도
술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오랜만에 들은 김석진이라는 이름에서도, 그리고 김석진이 깡패라는 이야기에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치는 동기들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시간이 지나 어렴풋해질만도 하건만,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는 호랑이 때문일것이다. 손사래를 치는 동기들에게 아니라며 자신이 들은게 맞다며 전혀 그렇게 안생겼는데 사진도 봤다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던 동기는 아무말이 없는 나에게로 방향을 틀어 가장 친했으니 알 것 같지않냐며 몸을 들이밀며 물었다.
"친하긴. 그냥 술 좀 같이 마신 거지."
"하긴. 개총 이후로 안 보이지 않았나? 기억에 없는데."
"맞아. 갑자기 사라진거 같기도 하고."
"그래, 그렇다니까. 너네도 그럴 줄 몰랐지? 나도 몰랐어. 그 기자가 사진을 딱 보여주는데, 세상에 그 형이더라니까."
다시 왁자지껄해진 술자리에 더 이상 소리도 들려오지 않을 정도로 생각이 많아져서 자켓에서 담배를 챙겨서 나왔다. 길거리에도 사람들이 많아 골목길로 들어갔다. 식당의 뒷문들이 늘어진 골목길에는 사람이 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담배 한가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끊어야지, 끊어야지 하면서 끊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에는 생각나는게 당연하지 않나. 다른 날도 아니고 김석진의 이야기가 나오는 날엔.
깊었던 감정이 아니어서인지. 제대로 시작을 못해서인지. 그 이후로 보지 못해서 그런지. 김석진의 이름이 나오니 한숨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라졌을때도 아무에게도 소식을 들려주지 않더니 몇 년만에 나와서 하는 말이 김석진이 깡패라는 이야기. 거기에 에이 설마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건.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면서 그 날을 후회하던 김석진의 얼굴이, 떠오르면 아프면서도 또렷해서. 그래서 그랬구나하면서 넘어갈수있어서. 그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돼서. 그래서 그랬구나.
대충 담배를 끄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피곤이 잔뜩 쌓인 어께를 풀지 못하는 불편한 이야기를 하는 술자리는 그다지 반갑지 않아 그냥 집으로 갈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쯤 되면 김석진의 이야기를 마치지 않았을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 골목길에서 다시 김석진을 마주하기 전까진.
"김석진?"
어두웠고 빛 하나 제대로 들어오지 않은 좁은 골목길이었지만 바로 알아 볼 수 있었다. 김석진이었다. 내가 담배를 피고 있던 골목길에 있는 작은 문으로 나온 사람은 김석진이었다. 작은 철문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대충 식당의 창고쯤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 그만큼의 생각도 많지. 골목길의 작은 철문에 신경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 조금의 관심조차 없던 철문에서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커다란 덩치들이 한두명 나오더니 그 뒤로 김석진이 따라 나왔다.
별로 먹지도 않은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무거웠던 마음 때문이었는지.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건지에 대한 궁금증이었는지. 김석진을 마주한순간 김석진의 이름부터 뱉어졌다. 좁은 골목길이고 사람도 없던 터라 김석진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김석진을 포함해 철문으로 나왔던 덩치들까지 나를 쳐다봤다. 그냥 모른척할걸.
"뭐야."
가장 앞에 서있는 그 중에서도 덩치가 큰 덩치가 자신이 깡패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일반 회사원이고 월급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일을 하는 일반 직장인인데. 덩치의 인상을 보다 나의 학자금 대출, 주택청약, 적금등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릎 끓고 빌까?
"정국이?"
인상을 가득 찌푸린 덩치를 살짝 밀면서 앞으로 나온 김석진은 어두운 곳에서 보아도 확연하게 알만큼 내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 김석진이었다. 벌써 몇년이 지났지만 김석진이 확실했다. 그때 ‘그’ 김석진, 그러니까 모자를 푹 눌러쓰고 커다랗고 동그란 안경을 쓰고 다니던 김석진이 아니라 내 자취방이었던 곳에서 호랑이를 발견했을 때 그 김석진이었다.
"진짜 정국이네."
"진짜 형이에요?"
"응. 이게 얼마 만이야.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다. 잘 지냈지?"
이런데서 나눌 대화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김석진은 그냥 수긍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김석진은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묻고 싶은게 많았다. 갑자기 왜 사라진건지. 정말 깡패가 맞는지. 지금 뭐하다가 온 건지. 그때 나에게 아무 감정이 없었는지.
"전 잘 지냈죠. 형은요?"
"나도 잘 지냈어. 여기는 어쩐 일로 왔어?"
"저기서 동기애들이랑 술 마시고 있었거든요. 기억나요? 다른 애들?"
"음. 글쎄, 내가 학교 애들이랑은 안 친했었어. 특히 내 동기들 말고 다른 애들은 더 그렇지."
"아, 그래요? 형은 여기 어쩐 일이에요?"
"나?"
아차 싶은 얼굴이었다. 마치 김석진이 사라지기 전 날의 대화하던 얼굴과 비슷했다. 피하고 싶어하는 얼굴. 유일하게 먼저 눈을 피하는 얼굴. 곤란하다는 얼굴이 보이자 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또 마지막이 되겠구나. 김석진의 대답이 나오기 전에 황급하게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거의 김석진에게 던지듯이 건네줬다.
"이거 내 명함이에요. 지금은 장소도 그렇고, 시간도 그렇고 이야기하기 뭐하니까 나중에 꼭 연락해요."
명함을 받아든 김석진이 명함을 보고 있는 동안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아직 김석진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 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기에 급하게 나가 술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도 김석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기들에게 김석진 깡패 맞다, 방금 내가 보고왔다고 소리를 빼액 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걸 알기에 그냥 짐만 챙겼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기들에게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얼버무리고선 황급히 밖으로 나왔다.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었다. 근데.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식당 앞에 조금 떨어진 그 골목길 입구에 서있는 김석진을 마주할 줄 알았더라면, 빨리 밖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정국아, 잠깐 이야기 좀 할래?"
안된다고 말하기에는 이미 내 손에 챙기고 나온 짐이 있었고, 김석진과 함께 있던 덩치들은 사라졌고, 나는 김석진과 풀고 싶은 응어리가 많았다. 김석진과 함께 탄 차는 삐까뻔쩍한, 내 월급을 평생 모아도 살까말까한 외제차였고, 이 차를 운전하는 김석진은 능숙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차안에서는 적막이 흘렀다. 하고싶은 이야기는 많았는데 할수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왕창 술에 취하는 건데. 앞 뒤 안가리고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술은 아까 김석진을 만난 순간부터 깨어있었다.
외제차앞에서 타라고 했을 때부터 대충 눈치는 챘지만 김석진은 나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향한 듯했다. 삐까뻔쩍한 외제차처럼 김석진의 집도 으리으리했다. 거실에 있는 쇼파에 나를 앉히고선 와인을 가져왔다. 커피나 차를 마시기에는 이미 술을 마시고 온 나와 맞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능숙하게 와인을 따르는 김석진이 어색했다. 내가 기억하는 김석진은 그때 '그' 김석진이었으니까. 호랑이로 와장창 깨졌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기."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요."
"등에 호랑이가 왜 있는지. 내가 깡패가 맞는지.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기가 막히게도 내가 궁금해하던 부분을 콕 찝어 말했다. 괜히 들킨 기분이 들어 앞에 놓인 와인을 홀짝였다. 아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통으로 맞혔다.
"깡패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 깡패. 그래서 등에 호랑이있는 것도 맞고."
"근데 왜 도망갔어요?"
"네가 다치는게 싫으니까."
"뭐라구요?"
"네가 다치는게 싫었어. 난 깡패 우두머리의 첫째 부인의 첫째 아들이고, 내가 도망치려고 했을 때 어떻게든 잡으려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너를 발견하는게 싫었으니까."
"도망?"
"깡패 아들인 게 싫어서 도망치려고 했거든. 깡패를 시키려는 깡패랑, 깡패가 되지 않게 하려는 엄마 사이에서 나는 엄마 편이었어. 깡패 되는 게 싫었거든. 말도 없이 도망친 건 미안해. 그냥 되도록이면 네가 모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형이 깡패인거?"
"응."
"왜요?"
"깡패가 떳떳한건 아니니까."
"그럼 후회한다고 했던 건요?"
"후회?"
"나랑 잔 거 후회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야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어. 상처받게 하고 싶지 않았어. 미안해."
"거짓말이였어요?"
"응."
"그럼 지금은 후회 안 해요?"
"안 해."
아직 궁금한게 많았지만 궁금증보다 더 못 참는게 있었다. 더 이상 질문을 잇지 못했다. 김석진의 눈을 마주보다가, 내 눈을 피하지 않는 김석진을 보다가 테이블을 성큼 지나 김석진의 얼굴을 붙잡고 입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감싸는 김석진의 손을 따라 무릎위에 앉았다. 테이블을 지나쳐 가느라 와인잔이 쏟아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자켓을 벗은지 오래라 셔츠 한 장을 벗어내기 위해 허둥지둥 단추를 풀어내는 손길이 다 풀지 못하고 엇나가기 시작했다. 단추를 푸는 내 손을 잡은 김석진이 손을 겹쳐 단추를 마저 풀어주었다.
술에 잔뜩 취했었던 대학생때의 그날밤도 아마 이렇게 정신없고 뜨거웠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 한번이 이렇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리가 없으니까. 그 날밤이 마치 어제였던 것처럼 김석진이 나를 쓸어내릴 때마다 그 기억이 생생하게 남았다. 씻지도 못했는데라는 생각은 아래에 있던 김석진이 위로 올라와 다시 내 입을 물때 잊어버렸다. 지금 중요한건 내 눈 앞에 있는 김석진이었다.
-
시끄럽게도 울려대는 알람소리를 급하게 껐다. 시간이 9시가 훌쩍 넘었다는 사실에 심장이 떨어질 뻔했지만 이내 주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번주에도 잘못 맞춘 알람으로 일찍 일어났다는 걸 알면서도 까먹고 그냥 놔뒀다가 또 이렇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잔뜩 찌푸린 눈으로 알람을 삭제하고 다시 이불속에 파묻히려는데 손에 닿는 단단한 물체에 화들짝 놀라 앉았다. 맞다. 어제 나 김석진이랑 있었지.
그때 그날 아침이 생각나 웃음이 나왔다. 여전히 엎드리고 자는 김석진의 등에는 떡하니 호랑이가 있었다. 차마 만져보지도 못했던 그때 그 호랑이가 생각이나 괜히 괘씸한 마음에 손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호랑이가 내 손가락을 따라 인상을 찌푸리는게 웃겼다. 김석진의 옆에 누워 호랑이를 조금 더 만지다 손을 내려 팔로 방향을 바꿨다. 또 언제 그려넣은건지 동물농장이 따로 없다. 팔뚝으로 타고 내려오는 검은 뱀 한 마리를 따라 내려오다 손이 콱 잡혀버렸다. 화들짝 놀라 손을 팩 빼버리려는데 오히려 품안으로 갇혀버렸다. 마치 오랜 연인처럼.
"잘 잤어?"
여전히 아침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 이 상태가 기분이 좋아 가만히 누워있었다. 고개를 대충 끄덕이니 김석진의 손이 머리에서부터 등까지 쓸어내렸다. 고양이를 쓰다듬듯이.
"팔에 왜 뱀이 있어요?"
"봤어?"
"응. 호랑이로는 만족이 안 됐어요? 원래 깡패면 다 문신을 해야하는 거에요?"
"아니, 꼭 그런건 아닌데. 나는 흉터가 짙어서 덮으려고."
"흉터?"
"응. 일하다 운이 안 좋으면 꼭 다치더라고."
"...다치지 말아요. 나 문신 싫어."
"진짜?"
"응. 호랑이랑 뱀 빼고. 그니까 이제 문신으로 덮을 흉터 만들지 말아요."
"알았어. 걱정시켜서 미안."
한참 전이나 만들어졌을 흉터와 상처에 속상한 나도 나지만 그에 사과하는 김석진도 김석진이었다.
"벌써 아침이네. 저 여기서 아침 먹고 가도 돼요? 오늘 주말이라서 일도 안 가는데."
"라면밖에 없는데."
"저 라면 좋아해요."
"내가 끓일게."
내 머리위에 가볍게 뽀뽀를 하고 일어선 김석진은 옷장까지 그냥 걸어갔다. 주변에서 옷을 찾고 싶었지만 우리 옷들은 쇼파 주변에 떨어져있었기에 거실까지 가야했다. 오는 길에 내 옷도 가져다주면 안돼냐고 묻는 나의 말에 자신의 옷장에서 티와 바지를 꺼내온 김석진이 건네준 옷을 입고 라면을 끓이려는 김석진의 뒤에 놓인 탁자 앞 의자에 앉았다. 김석진이 움직일 때마다 같이 움직이는 호랑이가 보였다. 이 호랑이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하고. 적어도 무섭지는 않았다.
"형."
"응?"
"호랑이 그릴 때 아팠어요?"
"당연히 아팠지."
"헐."
"왜?"
"아니, 그냥. 깡패라면서. 깡패면 많이 다쳐봤을거 아냐."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프더라."
"형."
"응?"
"왜 나 집으로 데려왔어요?"
물이 팔팔 끓는데도 김석진은 뒤를 돌아 나를 봤다. 나는 확신이 필요했다. 벌써 이 사람은 나를 떠난 적이 있었고 그때 떠난 이유가 여전히 존재하는데도 나를 계속 만날 수 있을거라는 확신이. 모험을 하기에는 더 이상 대학생이 아니었고 안정감을 찾기에는 김석진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함께 밤을 보냈지만 그건 그때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데려오면 안 돼?"
상황과 그다지 맞지는 않았지만 김석진의 눈은 어젯밤과 비슷했다. 아마 그 날밤에도 비슷했겠지. 물음에 반박할만한 답이 없었다. 몇 년만에 만나서 무작정 집으로 데려온 김석진이나, 몇 년만에 만난 김석진의 입을 냅다 문 나나. 거기서 거기였다. 다시 몸을 돌려 라면 스프를 넣는 폼이 익숙한 김석진이 달고 있는 호랑이를 보다가 가까이 다가갔다. 난 아직도 깡패의 생활을 모르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어느새 정들 것 같은 호랑이를 쓰다듬는 일 정도는 가능했다.
"형."
"응?"
"저도 등에 호랑이나 새길까요?"
"뭐?"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는 김석진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빨리 라면이나 끓여요. 다시 마주한 호랑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런 호랑이를 등에 매달고 학교생활을 마치려고 했던 김석진이 떠올랐다. 그런 김석진을 마주하고도 나를 피한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잔뜩 내었던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가장 어이가 없던 건 몇 년만에 마주해서 이렇게까지 매달릴 수 있는가였다. 김석진도. 나도.
내가 가장 안심할 수 있었던건. 하루가 지나도 도망치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김석진은 더 이상 내 눈을 피하지 않았고 나도 더 이상 김석진의 눈을 피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나도 정말 호랑이나 새길까. 아니면 검은 뱀을 그려 넣을까.
"정국아, 라면 다 됐어."
"네."
아무렴 어때. 호랑이든 뱀이든 가지고 있는 사람과 햇빛이 들어오는 탁자에서 라면을 먹는데. 마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